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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성경 번역 역사100주년 (4)
한자에 한글 토를 붙인 성경이 처음으로 번역되다
기사입력  2019/04/05 [05:20] 최종편집    크리스천비전

 

 

▲ 아메리칸대학교신학대학원 학장 남정숙 박사.     © 크리스천비전


◇한한 신약성서

   귀국 후 이수정과 함께 일본에 다녀온 안종수는 일본 방문 시에 만났던 츠다센을 소개합니다. 이후 이수정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갈 기회를 갖게 되는데, 동경제국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강사를 물색해 줄 것을 한국 정부에 요청해와, 이에 응모 선발되었습니다.


   이수정은 1882년 9월 수신사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도착하여 도쿄 농학사 츠다센을 방문했다가 한문 신약성서를 받아 이를 읽고 복음을 받아들여, 1883년 4월 29일에 세례를 받고, 미국성서공회 일본지부 루미스 총무의 권유로 성서를 번역하였습니다. 이수정은 1884년에 브리지만(E. C. Bridgeman)과 컬버트슨(N. S. Culbertson)이 고전 한문으로 번역한 중국어 성경(신약전서, 1859) 본문에 이두식 토를 붙이는 방식의 번역인「新約聖書 馬太傳」,「新約聖書 馬可傳」,「新約聖書 路加傳」, 「新約聖書 約翰傳」,「新約聖書 使徒行傳」을 출간하였습니다. 한문 본문을 그대로 두고 한글 토를 붙인 것이어서, 지식인들이 읽을 수 있는 번역이었습니다.


   이후 국한문병용체로「신약마가젼복음셔언ᄒᆡ」(1885)를 번역하였습니다. 번역 대본이었던 중국어 성서에서는 ‘야소기독’으로 번역되어 있었던 것을 그리스어를 따라 ‘예슈쓰크리슈도스’라고 음역하였습니다. 이외에도 ‘크리슈도스’(마 1:1), ‘밥테슈마’(막 1:4), ‘사밧’(막 6:2) 등과 같이 인명 지명 기타 주요 음역들은 그리스어에서 음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야스카와(Yasukawa) 목사와 녹스(G. N. Knox) 목사로 부터 번역에 도움을 받았습니다. 국한문 병용 형식의 번역은 한자를 모르는 사람도 읽을 수 있었고, 식자층들은 한자어 표기를 통해서 마가복음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에는 한국 문화 속에서 오래 전승되면서 형성된 언해문의 정갈한 문체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 목사와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목사가 한국에 입국할 때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왔고, 이후 국내에서 성서번역자회를 조직하고 시작한 최초의 작업이 이수정역의 개정이었습니다.


   1883년 말 이수정은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조국에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미국 교회에 요청하였습니다. 이수정의 편지는 일반 기독교 주간지 <The Illustrated Christian Week>의 1월호(1884년 1월 26일 발행)와 선교잡지 <Missionary Review>의 3월호에 게재되었고, 다른 잡지들이 이수정의 편지를 ‘마게도니아인의 부름’으로 지속적으로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이수정의 편지를 계기로 언더우드를 한국을 위한 선교사로 임명하게 됩니다.


   이후 이수정은 성경의 자국어 번역이 선교 사업의 기본이라고 인식하고, 개신교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 Loomis)와 존 녹스(John Knox) 선교사가 이수정의 번역 사업을 도와주었습니다. 1884년 미국성서공회의 자금 지원 아래 발간된 현토한한 신약전서는 기존의 한문 성서에 한글로 토를 단 것이었습니다. 본격적인 한국어 번역본 중 최초로 나온 것은『신약전서마가복음언해』였습니다. 초기 개신교 선교사 아펜젤러, 언더우드는 일본 요코하마에 체류하던 이수정에게 한국어를 배웠으며, 미국에서 일본을 통해 한국에 입국하는 선교사들은 이수정의 한국어 번역본 성경을 가지고 선교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1885년 7월부터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을 모아 예배집례를 주관했으며, 이들 유학생들 중에 개화파의 핵심 인물들이었던 서재필,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에게 개신교 교리를 전파했습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뒤 그는 조선 조정과 김옥균의 미움을 양쪽에서 받게 되었으며, 특히 김옥균이 보낸 자객에 의해 죽음의 위협에 놓이기도 하였습니다. 1886년 귀국과 동시에 개화파를 적대시하던 당시 집권 세력에 의해 처형되었으니 그의 나이 44세였습니다. 다음은 이수정 번역「신약마가젼복음셔언ᄒᆡ」(1885) 입니다. “우리 아버이 하늘의 계옵시니 원컨대 네성허옵다 이름나며 네나라이 임허여이르러 네 뜻시시러긍이뤼되 따해잇셔 하늘의 잇슴갓치 허시고 우리쓰는바 양식을 오날 나를 쥬시며 우리 모든 짐을 벗겨쥬시되 내가 내게 진 사람을 벗겨 쥬듯 허시고 더욱 나를 꾀와 혹허는 데로 인도 허시지 마옵시며 `이의 나를 악한데 건져 내여 쥬소서 대져 나라와 권 과 영훼 다 네게로 도라가 되 히의 대대로 밋츠옵쇼셔.
아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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